진 장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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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장양왕은 진 소양왕의 아들이자 진 효문왕의 후계자이며,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조나라의 인질로 있다가 상인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로 돌아갔고,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어 태자가 되었다. 효문왕이 즉위 후 3일 만에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3년 동안 통치하며 영토를 확장했으나, 3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영정이 뒤를 이어 진나라를 통일하고 진 시황제가 되었으며, 장양왕은 사후 태상황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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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장양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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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가문 | 영 |
씨 | 이인 (異人) 또는 자이 (子異) 또는 자초 (子楚) |
즉위 | 기원전 250년 11월 |
퇴위 | 기원전 247년 7월 6일 |
선대 | 효문왕 |
후대 | 영정 |
출생 | 기원전 281년 |
사망 | 기원전 247년 7월 6일 (33–34세) |
매장지 | 지양 (芷陽) |
시호 | 장양왕 (莊襄王) 또는 장왕 (莊王) 또는 양왕 (襄王) |
아버지 | 효문왕 |
어머니 | 하희태후 |
배우자 | 조희 |
자녀 | 영정 성교 |
왕조 | 진 |
이름 | |
성 | 영 (嬴) |
이름 | 이인 (異人) |
또 다른 이름 | 자이 (子異), 자초 (子楚) |
통치 | |
재위 | 기원전 250년 11월 - 기원전 247년 7월 6일 |
기타 정보 | |
연호 | 없음 |
추가 정보 | |
여불위 | 재상 |
2. 생애
진 소양왕의 손자이자 안국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국군의 첩인 하부인이었다. 여러 형제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조나라에 정치적 인질로 보내져 수도 한단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단에서 상인 여불위를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여불위는 이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장차 진나라의 왕이 될 가능성을 보았으며,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첩이었던 조희를 이인에게 소개했고, 조희는 훗날 영정을 낳았다.
여불위는 막대한 자금과 외교적 수완을 동원하여 이인이 진나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안국군의 정실 부인이지만 아들이 없던 화양부인을 설득하여 이인을 양자로 삼게 했다. 이로써 이인은 안국군의 적법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초나라 출신인 화양부인의 뜻에 따라 이름도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자초(子楚)로 바꾸었다.
기원전 251년 진 소양왕이 사망하고 아버지 안국군이 진 효문왕으로 즉위했으나, 왕위에 오른 지 불과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250년, 자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진 장양왕이다. 그는 즉위 후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조희를 왕후로, 아들 영정을 태자로 책봉했다.
장양왕은 3년 동안 재위한 후 기원전 247년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태자 영정이 왕위를 계승했고, 훗날 중국을 통일하여 진(秦) 왕조를 세우고 시황제가 되었다. 진 시황제는 아버지를 태상황으로 추존했다.
2. 1. 조나라 인질 시절
진 소양왕의 아들인 안국군 영주와 그의 첩 하희(夏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하희는 안국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20명이 넘는 형제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서열이 매우 낮았다. 결국 그는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진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이던 조나라에 정치적 인질로 보내져 수도 한단(邯鄲)에서 지내게 되었다.그가 조나라로 간 시기는 영정의 출생(기원전 259년)과 장평 대전(기원전 260년)을 고려할 때,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조나라 군대 40만 명을 생매장한 장평 대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조나라에서 그의 대우는 매우 열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는 "거마를 타고 행차할 때도 충분치 못했고 거처하는 숙소는 곤궁하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그가 겪었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중 한단에서 활동하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가 영이인을 만나 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기화가 거할 만하다(奇貨可居, 진귀한 재화로 삼을 만하다)"고 여겼다. 여불위는 영이인에게 막대한 투자를 약속하며, 안국군의 정비이지만 자식이 없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설득하여 그의 후계자 지위를 확보하라고 조언했다. 영이인은 "진나라를 나누어 그대와 함께 다스리겠다"고 답하며 여불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불위는 1000금 중 500금을 들여 진나라로 가 화양부인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화양부인에게 후사가 없을 경우의 불안정한 미래를 언급하며, 명망 높은 이인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울 것을 권했다. 그 사이 영이인은 남은 500금으로 조나라의 유력 인사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 화양부인은 여불위의 설득을 받아들여 안국군에게 간청했고, 마침내 영이인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어 안국군의 공식 태자로 지명되었다. 이때 화양부인이 초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영이인에게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자초'(子楚)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7] 이로써 자초는 아버지 안국군(효문왕)과 화양부인에게 막대한 예물을 받게 되었다.
후계자 지위를 얻은 전후로, 자초는 여불위가 소개한 조희라는 여인을 만나 아내로 맞이했다. 조희는 조나라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기원전 259년, 조희는 아들 영정을 낳았다. (일부 기록에는 조희가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초에게 시집갔다는 설도 남아 있다.)
기원전 257년 12월, 진 소양왕이 왕흘에게 명하여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위협을 느낀 조나라 효성왕은 자초와 그의 가족을 살해하려 했다. 이전의 공격에도 자초를 살려두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초는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감시하던 관리에게 600금의 뇌물을 주고 극적으로 한단을 탈출하여 진나라 군영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아내 조희와 아들 영정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조나라에 남겨졌다. 조나라 왕이 남은 가족을 해치려 했으나, 조희가 조나라 호족의 딸이었기에 몸을 숨겨 모자는 무사할 수 있었다.[6]
탈출에 성공한 자초는 진나라로 돌아갔다. 여불위의 조언에 따라 초나라 의복을 입고 화양부인을 만났고, 이는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
2. 2. 진나라 왕 즉위
기원전 251년 가을, 소양왕이 사망하고 아버지 안국군(安國君) 영주(嬴柱)가 효문왕(孝文王)으로 즉위했다. 이에 따라 자초(子楚)는 화양부인과의 약속대로 진나라의 태자가 되었다. 자초가 태자가 되자 조나라는 한단에 있던 조희와 아들 영정 모자를 진나라로 돌려보냈다.기원전 250년 음력 10월 신축일, 효문왕이 소양왕의 1년 상(喪)을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지 불과 3일 만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태자 자초가 왕위를 계승하여 장양왕으로 즉위했다.
장양왕은 즉위 후 아들 영정을 태자로 삼고, 자신의 후원자였던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했다. 여불위는 문신후(文信侯)로 봉해지고 하남(河南) 낙양(雒陽) 지역의 식읍 10만 호를 하사받았다. 또한 의붓어머니인 화양부인은 화양태후(華陽太后)로, 생모인 하희(夏姬)는 하태후(夏太后)로 높여졌다.
같은 해(기원전 249년), 장양왕은 여불위를 파견하여 동주(東周)가 제후들과 모의하여 진나라를 배신하려 하자 이를 토벌하고 동주를 멸망시켰다. 다만, 동주의 왕족은 존속시켜 양인의 땅을 주고, 주실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2. 3. 통치와 업적
기원전 250년, 아버지 효문왕이 즉위한 지 불과 3일 만에 사망하자[1]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오랜 후원자였던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아 문신후(文信侯)로 봉하고, 하남(河南) 낙양(雒陽) 일대의 식읍 10만 호를 하사했다.[1] 아들 정(政)을 태자로 삼았으며,[1] 이 소식을 들은 조(趙)는 효성왕의 결정에 따라 정과 그의 어머니 조희를 진나라로 돌려보냈다.[2][1] 장양왕의 의붓어머니인 화양부인은 화양태후(華陽太后)가 되었고, 생모인 하희(夏姬)는 하태후(夏太后)로 높여졌다.[3]장양왕은 소양왕과 효문왕의 정책 기조를 이어받아 기존의 공신들을 중용하며 주변국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3]
- 장양왕 원년 (기원전 249년): 동주가 다른 제후들과 연합하여 진나라를 배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여불위를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고 동주를 멸망시켰다.[3][1] 다만 동주의 왕족은 양인(陽人) 땅에 봉해져 주나라 왕실의 제사를 계속 지내도록 허락받았다.[3] 한편, 장수 몽오는 한(韓)을 공격하여 성고(成皐)와 공(鞏)을 점령했다.[3][1] 이 공격으로 진나라의 국경은 위(魏)의 수도인 대량(大梁) 근처까지 확장되었으며, 진나라는 이 지역에 삼천군을 설치했다.[3]
- 장양왕 2년 (기원전 248년): 몽오가 조(趙)를 공격하여 태원(太原)을 평정했다.[3][1]
- 장양왕 3년 (기원전 247년): 몽오는 계속해서 위(魏)의 고도(高都)와 급(汲)을 함락시켰다.[1][3] 또한 조(趙)의 유차(楡次), 신성(新城), 낭맹(狼孟) 등을 공격하여 37개 성을 빼앗았다.[1][3] 과거 장평 전투의 격전지였던 상당(上黨) 지역도 완전히 점령하고 이곳에 태원군을 처음으로 설치했다.[3] 같은 해 4월에는 일식이 관측되기도 했다.[3]
그러나 같은 해,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이 한, 조, 위, 초, 연 5개국 연합군을 결성하여 반격에 나섰다. 하외 전투에서 몽오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했고,[1][3] 연합군은 함곡관까지 진격하여 진나라를 압박했다.[3] 이 패배에 격분한 장양왕은 진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위나라 태자 증(훗날 경민왕)을 구금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위나라와 단독 강화를 맺어 합종을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했다.[3] 또한 진나라는 신릉군과 위나라 안리왕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간계를 펼쳤고, 결국 신릉군을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3]
장양왕은 이러한 격동의 시기를 보낸 후, 재위 3년 만인 기원전 247년 음력 5월 병오(丙午)일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 그의 뒤를 이어 태자 정이 진나라 왕으로 즉위했다.[1] 훗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장양왕은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되었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태상황 칭호가 사용된 사례이다.[3]
2. 4. 죽음
기원전 247년 5월 병오(26일), 35세의 나이로 훙거했다. 재위 기간은 3년에 불과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아들인 시황제에 의해 태상황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태상황의 칭호가 사용된 사례이다.3. 가족 관계
아버지는 진 소양왕의 아들인 진 효문왕이다. 어머니는 효문왕의 첩이었던 하희이다.
효문왕의 정실 부인이었던 화양부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상인 여불위의 설득을 받아들여 당시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장양왕(당시 이름 이인)을 양자로 삼았다. 초나라 출신이었던 화양부인은 그의 이름을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자초'로 바꾸어 주었다.
왕후는 조희이다. 조희는 본래 여불위의 첩이었으나,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장양왕(당시 이름 이인)에게 소개되어 부인이 되었다.
아들은 영정이다. 조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장양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했다. 영정은 이후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워 첫 번째 황제인 진 시황제가 되었다.
장양왕은 아들 영정에 의해 사후 태상황으로 추존되었다.
4. 평가
진 장양왕은 진 소양왕의 손자이자 진 효문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원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왕족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인생은 조나라에 정치적 인질로 보내졌을 때 만난 상인 여불위에 의해 극적으로 바뀌었다. 여불위는 장양왕(당시 이름 이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가 장차 진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 확신하며 막대한 정치적 투자를 감행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애첩이었던 조희를 이인에게 바쳤고, 조희는 훗날 영정을 낳았다.
여불위의 치밀한 계획과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한 뇌물 공세, 그리고 정치적 책략을 통해 이인은 진 효문왕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당시 효문왕의 정실 부인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화양부인은 초나라 출신이었는데, 여불위는 그녀를 설득하여 이인을 양자로 삼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이인은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자초'(子楚)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며,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기원전 251년 진 소양왕이 사망하고 진 효문왕이 즉위했으나, 효문왕은 재위 단 3일 만에 사망했다. 이로 인해 자초는 기원전 250년 진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진 장양왕이다. 장양왕은 즉위 후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 여불위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조희를 왕후로, 아들 영정을 태자로 책봉하여 왕권의 기반을 다졌다.
비록 장양왕의 재위 기간은 3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불위와 같은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고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함으로써 진나라가 중국 통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아들 영정은 훗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진 시황이 되었으며, 장양왕은 사후 아들에 의해 태상황으로 추존되었다. 여불위와의 관계는 그의 즉위와 통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진나라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다.
5. 대중문화
- 중국 드라마 《호란전》(2019)에서는 배우 모자준이 장양왕을 연기했다.
- 중국 드라마 《진시황: 천하통일》(2020)에서는 배우 辛柏青|신바이칭중국어이 장양왕을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Qin Dynasty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Kingship in Early Medieval China
Brill
[5]
서적
戦国策
[6]
서적
사기 여불위 열전
[7]
서적
전국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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